2009년 7월 31일 금요일

테스코 MADE IN CHINA 연필

저는 가보지 않은 마트를 들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울의 어지간한 대형 문구점이나 큰 화방 같은 곳은 거의 다 가 보았기 때문에

몇달에 한 번 들러서 뭔가 새로 업데이트 된 것이 있나 확인하는 정도입니다만,

딱히 아이템이 바뀐 것은 별로 없더라구요.

(그래서 요새는 이베이나 해외 인터넷 연필/문구 쇼핑몰을 애용합니다.)

하지만 마트에 가면,

간혹 굉장히 희귀한 국내산 연필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확률이 굉장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거 저거 살 때 겸사 겸사 들르는 편입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건지는 것은 보통 지우개입니다. 의외로, 제가 좋아하는 류의,

좀 진지한 디자인의 지우개들이 꽤 있더군요.


마트를 차지하고 있는 연필들은 대부분 중국제 OEM 연필들입니다.

유행을 엄청 타는, 애기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좀 붙여 놓은 연필들이 대세구요.

그나마 싸구려라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는, '브랜드'라 할만한 연필은 보통 3종을 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제가 싫어하는 비닐백 포장입니다.


아, 이 부분에서 정말 한국의 필기구 회사들에 대한 실망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필기구의 최강자, 모나미는 캐릭터 팬시 연필 외엔 만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발견한 연필들은 죄다 중국산이어서, 한국에 연필 공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평생 몇타스는 써봤음직한, 문화 더존 연필은,

근근히 브랜드 네임은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메이드인 차이나입니다.

의외로 문화는 오피스 연필을 한국에서 생산하는 신기한 모습입니다.

동아 연필은 그래도 꽤 많은 제품들을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파블 같은 제품의 경우도 어쩐지 그다지 대중화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닝글로리 역시 연필들은 대부분 중국산을 수입해 팝니다.



그래서, 어쨌거나.

마트에 가면 기대를 잔뜩하고 문구 코너로 가지만 또 딱히 건질만한 건 거의 없습니다.

캐릭터 연필이 아니면 일단 집어서 뒤를 보고, 중국산이 아니면 삽니다.

중국산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중화'같은 연필은 중국산이지만 열심히 사 모읍니다.

그건 진짜 중국산이니까요. OEM이 아니라.


마트에서 주문 생산한 PB 연필들도 비슷한 이유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연필을 보고 '테스코 PB 연필이네' 하고 지나치려다 뭔가 슬쩍 눈에 띄여서 집어 봤습니다.

뒷면을 보니,


역시나 제조국은 중국이구요.

그런데 눈길을 확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브랜드 이름. 그딴거 필요없다. 이 연필은 그냥 MADE IN CHINA HB 연필이다.

아, 이 대인배스러움.


전 사실 중국인들의 자존심이 가끔씩 짜증이 나면서도 때로는 또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중국제라고 하면 전 세계적으로 저가 저품질 저신뢰의 대명사입니다.

작년에는 중국산 안 쓰고 살아보기 같은 것도 유행했었죠.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보통 물건에 CHINA를 각인하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케이스에 조그맣게 표기하거나, 물건에 붙일 때는 스티커를 - 그것도 잘 떼어지는 놈으로 - 붙였었죠.

아예 원산지 표시가 없다는 것은 곧 중국산을 의미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새, 특히 필기구들의 경우 JAPAN이 아니면 감히 국적을 적어 넣지 못하던,

한국 내수용에서나 간간히 KOREA라는 단어가 붙던 모습이 깨어지고

너무나 당당하게 CHINA가 붙고 있습니다.


사실 전 문화 더존 연필에 CHINA 붙으면 절대로 안 살 거거든요.

문화 더존이 아니라 그 어떤 나라의 어떤 회사에서 '주문'한 연필이라 하더라도

중국 브랜드가 아니면서 CHINA 붙어 있으면 안 살 생각이고,

마트의 PB 연필도 살 생각이 없습니다.

실사용으로야 이미 죽을 때 까지 쓴다 해도 10%도 다 못 쓸 만큼의 연필이 있는데

제 기준에 맞는 수집의 가치가 없는데 굳이 살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저 연필은 사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타스에 790원 줬어요. 마스 루모그래프 1자루 값입니다.

제가 직접 돈 주고 산 연필들 중에  가장 싼 연필입니다.

그런데 왠지 저 연필을 모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게 써 있는 저 'MADE IN CHINA HB'는 마치 저에게

'그래, 이건 중국산이야. 싸지. 질이 그다지 좋진 않을 지도 몰라. 그 대신 싸지.

 하지만 중국산이라는게 부끄럽지 않아. 절대로!'

라고 포효하는 듯 합니다.


삼성의 성공 비결은 '한국산 아닌 듯 하기' 혹은 '일제인 듯 하기'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래서 아직도 서구 사람들은 삼성이 일본 회사라고 알고 있다고.



굳이 쓸 필요가 없었을 국적 문구를, 그것도 저렇게 크게 박아 넣는 것은 음모론(?)으로 생각하자면

'어차피 발주 물량 정해져 있는 거고 한 번 찍으면 두 번 거래할 일 없을 수도 있는 품목이니

 굳이 많이 팔 생각이 없어서 찍은 거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납품한 게 잘 팔리는게 회사에 이득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또한 메이드인 차이나를 저렇게 박아 넣는 것이 결코 매출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자명한데도 했다는 것은,

글쎄요, 제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만, 애국심 때문이 아닐까요?



저 연필의 제조사는 Shanghai Carco Stationery Co., Ltd. 입니다.

언젠가, 저 회사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만든다면 꼭 한 번 사서 써 보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비록 나라는 다르더라도.

이제는 거의 사라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한 한국의 연필 산업을 잠시 바라보다가,

저들의 애국심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댓글 7개:

  1. 엄청난 저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중국산 연필이 의외로 품질이 괜찮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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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link - 2009/08/06 22:30
    사실 저 연필은 나무의 질부터 아주 안 좋아보입니다. 아직 써 보지는 않았는데요. 그냥 뭐랄까요. 애국심에 대한 감동 뭐 그런 이유로 샀습니다.



    최근에 국내 문구회사 연필들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산되는데, 가격대 성능비가 괜찮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뭔가 맘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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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요즘 연필의 사각사각한 매력에 빠지고 있는 중인데요 ^^

    연필을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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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회오리바람 유이 - 2009/08/09 23:36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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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trackback from: [연필]Mitsubishi Uni Kurutoga
    선물받은 샤프. 주로 펜을 즐겨쓰다보니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가 오픈해서 몇 일 쓰고 있는데 정말 부드럽다. 샤프를 거의 쓴 적이 없다보니 뭔가 특별한 기능은 파악하기 어려우나...좋은 샤프임엔 틀림없다. Posted via email from Banditapple'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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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위에 사진 중 Made in China 각인 연필과 그 밑의 내요을 보고

    빵 터졌습니다. ^^



    안그래도 포스트 꺼리 좀 드릴께 있는데.. ㅋㅋ

    (떡밥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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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저랑 동지이시군요.



    저두 마트에서 국산 찾아 헤멘답니다.



    아직 국내에서 연필 생산하는곳도 있어 다행이더군요.



    소량(1000자루 단위)으로 주문생산 (주문인쇄만 하는 것인지는 확인 못했습니다.) 해 주는 곳도 있어서 Made in Korea만 확인되면 한번 제가 디자인 해서 주문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 자주 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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