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2일 일요일

영국 스테들러 노리스 연필

블로깅을 시작하고 나서 얻게 된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는 뭐니뭐니해도

여러 연필, 필기구, 문구 애호가분들과 만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호주 스테들러의 트래디션처럼, 오늘은 스테들러 영국 공장에서 생산한,

이제는 단종되어버린 영국 스테들러 노리스 연필에 대한 리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리뷰할 연필들은 현재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독일인인

Matthias Meckel씨가 보내준 연필입니다.


당연히, 기본적인 디자인은 독일산과 영국산에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결국 MADE IN GREAT BRITAIN이

MADE IN GERMANY 대신 인쇄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박스의 디자인은 조금 다릅니다.

독일산 노리스의 경우 위에 보시다시피 심의 경도가 박스 전면부에도 인쇄되어 있지만,


영국산의 경우 전면부 표시가 없고, 열고 닫는 뚜껑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경도 표시의 인쇄 위치가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의 박스만 제작한 뒤에

경도를 따로 찍은 듯 합니다.



시필을 해 본 결과, 지우개가 없는 120 모델의 경우 심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다만, 끝을 예리하게 하는 도중에 약간씩 부러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독일산에서는 보기 힘든 일입니다.


H 경도의 경우, 저로서는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했고,

B 경도의 경우, 독일산의 입자가 좀 더 고운 느낌이었습니다.

2B 경도의 경우, 독일산의 입자가 조금 더 고운 편이기는 했지만,

B 경도보다 그 차이가 훨씬 더 작아서 느끼기 어렵습니다.

시필에 사용된 HB 등급은 지우개가 달린 122 모델이었습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아래 쪽에 있는 영국산의 지우개가 훨씬 작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영국산 122 모델의 질은 독일산 122에 비해서 훨씬 떨어지는, 아주 거친 느낌입니다.

다른 영국산 120 모델과 비교해 봐서도 도저히 같은 브랜드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영국산 122의 경우 본격적으로 사무/학습용의 저렴한 컨셉이지 않나 싶습니다.

더 작고 품질도 떨어지는 지우개에, 질이 아주 떨어지는 심이라니, 정말 실망입니다.


박스 디자인을 보아도, 독일산 120, 122나 영국산 120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왠지 스테들러 영국에서 따로 (어쩌면 본사 몰래) 제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혹시 독일한 120의 H, B, 2B 경도 연필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시지는 않았나요?


네, 독일산과 영국산의 캡 색깔이 다릅니다.

독일산의 경우 B 경도가 검은색, 2B 경도가 주황색 캡을 가지고 있는데요,

영국산의 경우는 그 반대입니다.


바코드가 찍혀 있는 면을 보니 다행히 바코드는 등급에 따라 제대로 박혀 있네요.

바코드는 코드를 등록한 국가에서 발급합니다. 따라서 독일 국가 번호가 찍힌 바코드가 있다고 해서

꼭 독일산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조금 놀랍습니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인해서, 영국산도 독일산과 같은 바코드를 가지게 된 듯 합니다.




비록 122 모델의 경우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떨어지는 품질을 보여주었지만,

전체적으로 영국산 노리스 연필의 품질은 독일산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연필이 더 이상 생산되지 못한다는 것은 또한 가슴아픈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귀중한 연필을 나누어 준 Matthias Meckel 씨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Danke schön!


2009년 11월 11일 수요일

몰스킨 vs. 미도리

늘 한결같은 일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하루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기로 기록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기'라는 단어가 주는 조금은 정형화된, 매일 밤 하루의 일을 반추하며 적는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그냥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적는 편입니다.

올해는 그래도 제법 꾸준히 일기를 적어오긴 했는데, 그 전에는 많이 게을러서

재작년에 마련한 몰스킨 노트를 최근에야 다 쓰게 되었습니다.


연필로 글을 쓸 때면 늘 최고의 필감을 안겨주던 몰스킨 노트였지만,

불행히도 몰스킨의 종이는 만년필과의 궁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잉크가 잘 번지고 뒤로 새어 나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게다가 줄간 간격이 6mm밖에 되지 않아서, 만년필로 글을 쓸 때면 EF 닙이나 UEF닙을 써야 했습니다.

특히 아무래도 닙이 얇으면 잉크가 적게 나오기 때문에, 뒤에 번지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닙의 펜이 필요했지요.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플래티넘 밸런스 UEF닙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UEF 닙을 쓰는 것에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제가 가진 몽블랑 F닙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좀 불만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알뜰하게 몰스킨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쓰고 나서,

옛 추억들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훑어본 다음에 노트를 덮었습니다.

아, 몰스킨의 단점이 하나 또 보이네요.

오래 써서 그런지, 노트 커버의 접히는 부분이 죄 뜯어져서 결국 테이프로 덧대주어야 했었죠.

어쨌거나 이제 과거의 기록이 되어버린 몰스킨을 책장 한 켠에 넣어 두고,

새 노트를 열었습니다.

새 노트는 철저히 몰스킨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선택했습니다.

만년필 친화적이며, 줄간 간격이 좀 더 넓고 제본의 내구도가 좋은 그런 노트.

바로 미도리 MD 노트입니다.

이 일본산 노트는 그러나 노트만으로는 내구도가 썩 좋지 않은 편입니다.

예전에는 비닐 커버를 덧씌워 흰색 종이 커버에 오염이 묻지 않도록 했었는데,

최근에는 가죽 커버가 새로 출시되었습니다.

'시간을 들여 만들어 가는 가죽 커버'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커버는,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원래는 베이지색에 가깝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햇빛에 타고 손때가 묻어

황토색으로 변해간다고 합니다.

인간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며 제품의 가장 큰 결점을 은근슬쩍 감춰버리는 지극히 일본적 상술이죠.



커버 없이 그냥 쓰는 미도리 MD 노트는 그리 오래지 않아 너덜너덜해질 것 같지만,

가죽 커버를 씌워 두면 아주 든든합니다.

몰스킨도 이제는 중국에서 만들지만, MD 노트는 아직까진 일본에서 만들고 있군요.



커버의 뒷면에는 펜 홀더가 매립식으로 달려 있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입니다.


한동안 제대로 사용될 일 없어서 조금은 속상했었을 몽블랑 솔리테어 1844를 출동시켰습니다.

몰스킨 노트였다면 뒷면이 난리도 아니겠죠?


뒷면에서 보면, 앞에 글자를 쓴 것까지는 보이지만, 뒤로 잉크가 새어나오지는 않습니다.

이 정도면 진정 Fountain-Pen-Friendly라고 불러줄 수 있을 법 하군요.


가지고 있는 만년필들을 총 동원해서 몇 페이지를 사용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노트의 줄간격이 몰스킨보다 1mm 더 넓은 7mm이고 잉크가 잘 안 번지는 재질이다보니,

F닙으로 쓰는 것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일반적으로 EF닙 정도면 글씨를 작게 쓰는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 괜찮은 느낌을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플래티넘 UEF처럼 아주 가는 닙으로 쓸 때의 필감은 썩 좋지많은 않습니다.

아무래도 종이가 약간 거칠고 '메마른' 느낌이기 때문에, 너무 작은 닙으로는 종이 표면의 요철이 좀 더

잘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UEF의 장점이 너무 과하게 드러나는 느낌입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점이라면, 만년필로 쓸 때의 필감을 극대화시키려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연필로 쓸 때의 필감이 썩 좋지많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이의 질이 약간 메마르고 거친 편이어서, 연필 심이 뭉툭해진 상태에서는

흑연이 종이에 고르게 묻지 않습니다. 줄간격이 넓기 때문에 뭉툭해진 연필을 더 잘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실망한 마음을 조금 추스리고 나니 오히려 단순한 진리가 와 닿습니다.

결국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